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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 - E. H. Gombrich

by No내임 2024. 10. 13.

 

 

(선사 및 원시부족들)그것들은 순수한 예술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일정한 기능(실용적, 주술적)을 가진 물건으로 간주되었다.

 

2. 영원을 위한 미술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크레타)

58p. 실제로 조각가를 가리키는 이집트 말 중의 하나는 "계속 살아 있도록 하는 자" 였다. /

이 기하학적인 규칙성과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력의 결합은 모든 이집트 미술의 특징을 형성한다.

60p. 그래서 그들은 처음부터 어떤 우연한 각도에서 보이는 대로의 자연의 모습을 그리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림에 들어가야 할 모든 것이 극명하게 나타나도록 보장해주는 엄격한 규칙에 따라서 기억을 더듬어 그렸다. 사실 그들의 방법은 화가의 방법이라기보다는 지도를 제작하는 사람의 방법과 비슷했다. 나무들의 생김새와 특징은 측면에서 보아야만 명확할 것이고 연못의 행태는 위에서 보아야만 분명해질 것이다...

67p. 신왕국 18왕주시대의 아멘호테프(Amenhotep) 4세. 오랜 전통에 의해서 숭상되어온 많은 관습들을 타파했다. Akhnaron. 후계자가 투탕카멘(Tutankha-men)

70p. Mesopotamia. 채석장에서 구운 벽돌로 건물이 만들어졌는데, 풍화작용으로 변했을 것이므로 조각이 별로 없다.

 

3. 위대한 각성 (기원전 7세기부터 기원전 5세기까지, 그리스)

78p. 일단 이 고대의 규칙들이 깨지고 또 미술가들이 자신들이 본 것에 의지하기 시작하자 진정한 사태가 전개되었다. 화가들은 무엇보다도 위대한 발견, 즉 원근법에 의한 단축법(foreshortening)을 발견했던 것이다.

84p. 오늘날 미술관에 소장된 대부분의 조각품들은 여행자나 기념품 수집가들을 위해서, 또는 정원이나 대중 목용탕을 장식하기 위해서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복제품들이다.

 

4. 아름다움의 세계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 그리스와 그리스의 세계)

103p. 기원전 4세기 최대의 미술가인 프락시텔레스(Praxitelles) - 헤르메스와 어린 디오니소스, 능숙한 조각가의 손길을 통해서 낡은 유형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이제 진짜 사람들처럼 우리 앞에 서 있으나 우리의 세계와는 다른 보다 나은 세계에서 온 사람들같이 보인다.

108p. 이 후기 시대의 미술은 그리스 미술이라고 부르지 않고 알렉산더 대왕의 후계자들이 동방의 나라에 건설한 제국의 이름을 따서 헬레니즘(Hellenism) 미술이라고 부른다. - 새로운 형태의 원주 코린트 양식

113p. 고대의 유명한 거장들 중에는 조각가보다 화가가 더 많았으나 우리는 전해내려오는 고전 시대의 미술 서적에서 발췌된 작품에서 알 수 있는 것 외에는 그들의 작품에 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 폼페이를 비롯한 기타 장소에서 발굴된 장식적인 벽화와 모자이크를 보는 길밖에 없다.

115p. 그리스인들은 초기 오리엔트 미술의 엄격한 제약을 철저하게 타파하고 관찰을 통해서 종래의 전통적인 이미지에다가 점점 더 많은 특성들을 첨가하는 발견의 항해를 계속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작품은 자연의 말초적인 세부까지 낱낱이 반영하는 그런 거울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의 작품은 언제나 그것들을 만들어냈던 지성의 각인을 지니고 있다.

 

5. 세계의 정복자들 (기원후 1세기부터 4세기까지 : 로마, 불교, 유태교 및 기독교 미술)

1층은 도리아 식의 변형으로서 메토프와 트라글라프 까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2층은 이오니아 식이고, 3층과 4층은 코린트 양식의 반원주이다. 로마식 구조와 그리스형식, 또는 '그리스의 기둥 양식들'과의 결합은 그 이후의 건축가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 로마 건축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아치의 사용이다. 이러한 건축물 중에서 가장 경이적인 것은 <판테온( Pantheon)이다.

121p. 그들이 주로 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실물을 꼭 닮은 초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초상의 엄숙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미술가들로 하여금 그리스인들이 했던 것처럼 실물을 조금도 미화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초상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다는 점이다. / 당시의 장례 행열에는 선조의 밀랍 초상을 들고 가는 것이 하나의 관례였다.

127p. 유태교의 율법은 우상 숭배를 경계하여 형상의 제작을 금지했다. / <바위에서 물을 솟아나게 하는 모세 - 두라에우로포스 - 메소포타미아의 유태교 회당의 벽화> 그의 그림이 실물을 닮으면 닮을 수록 형상의 제작을 금지하는 십계명에 대해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이 되었으리라. 그의 주된 의도는 보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자신의 능력을 보인 그때를 상기시켜 주는 것이었다.

 

6. 기로에 선 미술 (5세기에서 13세기까지 : 로마와 비잔티움)

136p.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시도에 사용한 형식들은 원시 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더 발전된 것이었다.

 

7. 동방의 미술(2세기에서 13세기까지 : 이슬람과 중국)

인간의 형상을 그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동양의 장인들은 그 대신 문양이나 형태 자체의 아름다움에 그들의 상상력을 발휘했다. 그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라고 알려진 매우 정교한 레이스와 같은 장식을 창조해냈다. (+알함브라 궁)

150p. 중국 사람들은 그림을 그리는 일을 천한 일로 생각하지 않고 화가를 염감을 받은 시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은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 중국 미술가들은 소재를 직접 대하고 그리기 위해 밖으로 나가 사생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명상과 정신 집중이라는 색다른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예술을 익혔다.

 

8. 혼돈기의 서양 미술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 유럽)

164p. 우리는 이와 같은 그림에서 고대 오리엔트 미술이나 고전 미술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새로운 중세 양식의 출현을 보게 된다. 이집트 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 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린 반면에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이 '느낀' 것을 그림 속에 표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이다.

167p.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책이 해주는 역할을, 그림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다 - 그레고리우스 교황

 

9. 전투적인 교회 (12세기)

1066년,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이 영국을 정복한 해. 영국에 상륙한 노르만 인들은 노르망디 및 그 이외의 지방에서 그들 세대 중에 형태를 갖추었던 발전된 건축 양식을 들여왔다. / 이러한 건물들을 세운 양식은 영국에서는 노르만(Norman) 양식으로, 유럽 대륙에서는 로마네스크(Romanesque)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이 양식은 노르만 침량 이후 백년 이상이나 번창하였다.

179p. 로마네스크나 노르만식 교회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육중한 각주가 받쳐주는 둥근 아치들이다. 이런 교회들이 주는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인 인상은 중후한 힘이다. 이런 교회 건물에는 장식도 거의 없고 창문도 몇 개밖에 없었으며 중세의 성채를 연상시키는 견고하고 잇달은 벽과 탑뿐이었다.

175p. (지붕) 가장 좋은 방법은 기둥들 사이에 아치나 늑재를 서류 엇갈리게 걸쳐놓고 나서 이 늑재 사이의 삼각형 부분을 메우는 것이었다. - (고딕양식으로 발전)

180p. 우리는 12세기가 십자군의 세기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자연히 12세기는 그 이전보다 비잔틴 미술과의 접촉이 ㅁ낳아져서 그 시대의 많은 미술가들은 동방 교회의 장엄하고 성스러운 성상들을 모방하고 서로 지지않으려고 애썼다.

183p. 이 시기의 회화는 사실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보다 단순화된 표현방법으로의 복귀는 중세의 미술가들에게 보다 복잡한 형식의 구성(Composition : 짜맞추는 것)을 실험하는 새로운 자유를 주었다. + 자유로운 색채 활용 - 초자연적 세계의 관념 전달에 집중

 

10. 교회의 승리 (13세기)

186p. 그 새로운 이념은 프랑스 북부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바로 고딕(Ghthic) 양식의 원리였다. 서로 교차하는 아치를 이용하여 교회의 둥근 천장을 만드는 방법은 노르만 건축가들이 꿈꾸었던 것 이상으로 일관성 있고 보다 훌륭한 건축의 실현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기둥들 사이의 육중한 벽들은 모두 불필요한 것들이어서 그 대신 큰 창문을 낼 수 있었다.(돌과 유리로 만든 건물)

188p. 과거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들은 아마도 그 힘과 권세에 있어서 악의 공격에 대해서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전투적인 교회'라는 인상을 주었을 테지만 이 새로운 고딕 성당들은 신자들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엿보게 해주었다. 신자들은 설교와 찬송가를 통해서 진주로 만든 문과 값진 보석, 순금과 투명한 유리로 된 천상의 예루살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이제 그러한 환상의 광경이 하늘로부터 지상에 내려온 것이다. 성당의 벽은 루비나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스테인드 글라스로 만들어졌다. 기둥과 늑재, 창의 트레이셔리 장식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육중하고 세속적이고 단조로운 것은 모두 다 제거되었다. 이 모든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데 넋을 잃은 신자들은 물질세계를 초월한 별세계의 신비를 이해하게 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건물들 중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는 파리의 노트르담(Notre-Dame) 대성당의 정면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201p. 비잔틴 보수주의의 주문을 깬 한 천재가 신세계로 감히 뛰어들 수 있었으며 고딕 조각의 실물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대입시킬 수가 있었다. 이처럼 천재적인 이탈리아 미술은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에서 확인되어 진다. 미술사 책에서는 대게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을 시작하는 것이 통례이다. 조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벽화, 즉 프레스코들이다. (프레스코라는 명칭은 벽에 바른 석고가 채 마르지 않은, 즉 젖어(fresh) 있을 때에 그림을 그린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다. / 평평한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 / 조토의 명성은 널리 세상에 퍼져서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겼다. 그들은 그의 생애에 흥미를 가졌으며 그의 기지와 재주에 관한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것 역시 상당히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후로 처음에는 이탈리아에서, 그리고 뒤이어 다른 나라에서도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11. 귀족과 시민 (14세기)

약 150년 뒤 이 도시들은 상업의 변화된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로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권력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더 이상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음침하게 격리되어 살기보다는 안락과 유행하는 사치가 있는 도시로 이주해서 권력자의 궁전에서 그들의 부를 과시했다. 14세기의 고딕 양식 건축가들은 벌써 초기 성당의 분명하고 장엄한 외관에만 만족하지 않고 장식과 복잡한 트레이서리를 통해서 그들의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엑서터 Exeter 대성당)

Chaucer?

212p. 북유럽 미술가들의 취향과 양식이 대단히 깊은 영향을 준 곳은 또 하나의 토스카나 마을로 피렌체의 적수였던 시에나(Siena)에서였다. 조토와 같은 세대로 시에나의 거장인 두초(Duccio, 1255/60년경 ~ 1315/18년경)는 고대 비잔틴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서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221p. 미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의 그림 속에 얼마나 많은 양의 뛰어난 세부 묘사가 들어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연의 관찰을 통한 꽃이나 동물들의 세부 묘사에 숙달되는 새로운 기술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라 시각의 법칙을 개척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가들이 했듯이 인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어 그것을 토대로 조각과 그림을 제작하려 하였다. 미술가들의 관심이 이런 방향으로 변하자 중세 미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라고 불리우는 시대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12. 현실성의 정복 (15세기 초)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말은 재생 또는 부활을 의미한다. 이탈리아 인들의 마음 속에 품은 부흥이라는 관념은 '위대했던 로마'의 재생이라는 생각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돌아다보는 고전 시대와 그들이 이제 희망하는 재생의 새로운 시대 사이에 놓인 기간은 단지 하나의 슬픈 막간, 즉 '중간 시대'에 불과했다. 이렇게해서 재생, 즉 르네상스라는 관념은 그 중간의 시대가 '중세'라는 관념을 낳게 했으며 지금도 우리는 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고트족 때문에 로마 제국이 몰락했다고 생각했으므로 마치 우리가 아름다운 물건들을 쓸데없이 파괴하는 것을 가리킬 때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 중간 시기의 미술을 고딕(Gothic) 미술이라고 부르고 '야만적'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224p. 이들 젊은 피렌체 예술가 집단의 지도자는 건축가인 필리포 브루넬리스키 (Fillippo Brunelleschi : 1377 ~ 1466)였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그는 로마를 여행하며 신전과 궁전의 유적들을 측량하고 건물들의 형태와 장식들을 스케치했다고 한다. 그가 목표했던 것은 새로운 건축 방법의 창조였으며 그러한 의도 내에서 고전 건축의 형식들을 새로운 조화화 미를 창조하는 데 자유로이 이용하는 것이다.

229p. 브루넬레스키의 일파 중 가장 위대한 조각가는 리렌체의 대가 도나텔로(Donatello ": 1386? ~1466)였다. 

235p. 그러나 북유럽에서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완전히 새로운 것을 표현한다고 느껴지는 혁명적인 창의성을 보인 사람은 화가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 1390?~1441)였다.

240p. 그가 발명한 유화는 원근법의 발견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가 이룬 업적은 안료를 화면에 칠하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처방을 고안해냈다는 데 있다. 그 당시에 화가들은 튜브나 상자 속에 들어 있는 기숭품으로 된 물감은 구입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부분 색깔이 있는 풀이나 광물질에서 그들 자신이 사용할 안료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그들은 이것을 맷돌 같은 것으로 갈거나 도제들을 시켜서 빻게 한 후 사용하기 전에 이 가루를 일정의 반죽과 같이 응집시키기 위해서 용매를 첨가했다. 이렇게 반죽을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으나 중세까지는 이 용매의 주된 성분은 달걀이었다. 달걀은 너무 빨리 마르는 점을 제외하면 아주 적합한 것이었다. 이러한 식으로 안료를 준비해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템페라(Tempera)라고 불렀다. 그는 달걀 대신 기름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여유있게, 그리고 보다 더 정확하게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는 투명한 층, 또는 겉칠(Glaze)에 이용할 수 있는 광택 있는 색채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뽀족한 붓으로 반짝이는 하이라이트를 찍어넣을 수 있게 되었으며 경이로운 정확한 묘사를 성취하여 그의동시대 사람들을 놀라게 함과 동시에 유화를 가장 적합한 매체로 받아들여 널리 쓰이게 만들었다.

 

 

13. 전통과 혁신 1 (15세기 후반 : 이탈리아)

화가들과 그 후원자들은 다 같이 미술을 성경의 이갸기를 감동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는 데에만 사용하는 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한 단면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데에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매혹되었다. 모든 곳의 미술가들이 새롭고 놀라운 효과를 얻기 위해서 실험과 탐구를 시작 - 이 모험정신은 중세와의 진정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도시들이 큰 세력을 얻게 되자 미술가들은 다른 직공이나 장인들처럼 길드(Guild)를 조직했다. 이 길드는 여러가지 점에서 오늘날의 노동 조합과 유사하다. 길드의 임무는 조합원의 권리와 특권을 보호하고 그들의 제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안전한 시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길드에 가입하기 위해 미술가들은 일정한 수준에 도달해야 했는데, 다시 말하자면 그가 하나의 기술면에서는 완전하게 익히고 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다음에 그는 자기의 공방을 열 자격이 있었고, 견습공들을 고용해서 제단화, 초상화, 채색된 가구, 깃발과 문장 등의 주문을 받을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248p. 15세기에는 미술이 각기 다른 여러 유파(School)들로 분열되어 이탈리아, 플랑드르, 독일 등지의 모든 도시나 마을에는 그 나름의 '회화 유파'가 생겨났다. 그 당시에는 젊은 학생들이 다닐 수 있는 미술학교 같은 것은 없었다. 만약에 한 소년이 화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의 아버지는 그를 아주 어릴 때부터 그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 밑에 견습생으로 보낸다. 그는 보통은 그 거장의 집에서 먹고 자며 주인공의 심부름도 해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면에서 쓸모 있는 일꾼으로 성장해야 했다. 견습생이 처음에 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는 스승이 사용할 물감을 개거나 나무 패널이나 캔버스를 준비해두는 것이었다. 점차 그에게는 깃대를 그리는 것과 같은 사소한 일이 주어지게 된다. 그런 다음에 어느 날 스승이 몹시 바쁠 때 그는 견습을 하는 제자에게 작품에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거나 눈에 잘 띄지 않는, 예를 들어 이미 윤곽을 그려놓은 곳에 색칠을 하거나 그 장면에 나오는 구경꾼들의 옷을 마무리하는 그런 일을 주게 된다. 만약 그때 그가 재능을 보이고 스승의 양식을 완전하게 모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면 점차로 그에게는 보다 더 중요한 일, 즉 스승의 스케치를 가지고 그의 감독하에 그 그림 전체를 완성시키는 것과 같은 일이 주어지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당시 15세기 '회화의 유파'들이었다. 이런 유파들은 사실 훌륭한 미술학교들이었다. 한 도시의 스승들이 그들의 기술과 경험을 제자들에게 전수해주는 방법은 또한 이런 도시의 '회화 유파'가 어떻게 해서 그처럼 분명한 독창성을 발전시켰는지를 설명해준다. 15세기의 그림은 그림 자체만 보아도 그것이 피렌체의 것인지 또는 시에나인지, 디종 또는 브뤼주, 쾰른 또는 비엔나의 것인지를 식별할 수가 있다.

249p. 피랜체의 건축가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 1404 ~ 72). 그러므로 문제는 벽과 창문을 가진 재래의 집과 브루넬레스키가 건축가들에게 사용하라고 권장한 고전적인 형식을 절충시키는 것이었다. 

251p. 새로운 업적과 재래의 전통을 조화시키는 데에 성공한 피렌체의 거장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는 도나텔로와 같은 세대의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 1378 ~ 1455)를 들 수 있다.

252p. 기르베티가 당대의 새로운 발견들을 이용하는 것을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고딕 미술의 이념에 충실했던 것처럼 피렌체 부근 피에솔래(Fiesole)의 위대한 화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 1387 ~ 1455)도 주로 종교 미술의 전통적인 이념을 표현하기 위하여 마사초의 새로운 방법들을 응용했다. 피렌체 산마르코 수도원의 <수태고지>

256p. 유명한 대학촌인 파도바(Padova)에서 작업하다가 그 후 만토바(Mantova)의 영주의 궁전에서 일했던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가 있다. 2차대전중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사형장으로 호송되는 성 야고보를 묘사한 작품. 그 현실성이라고 부른 기준은 조토의 시대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것이 되어 있었다.

259p.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 1416? ~ 92) 그는 무대의 공간을 암시하는 이런 기하학적인 방법 이외에도 그와 동일하게 중요한 새로운 방법, 즉 빛의 처리를 더해주고 있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의 꿈>

262p.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 1446 ~ 1510)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노력한 15세기 후반의 피렌체 화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비너스의 탄생>

 

14. 전통과 혁신2 (15세기 : 북유럽)

루앙의 법원 건축물은 '플랑부아양(Flamboyant : 타오르는 불꽃 모양) 양식'이라고도 불리워지는 프랑스 고딕 양식의 최후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건축물들에서 설계자들이 고딕 건축의 마지막 가능성까지 다 소진해버렸으므로 그 반작용이 조만간 뒤이어 일어날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273p. 15세기 중엽에 쾰른에서 작업을 했던 독일 화가 슈테판 로흐너(Stefan Lochner : 1410? ~ 51)는 어느 정도 북유럽의 프라 안젤리코라고 말할 수 있다. <장미 그늘 아래의 성모> 

274p. 익살의 정신이 일상 생활을 매력적으로 묘사한 이 그림들에서 결실을 보게 되었다. 로마를 방문한 (1450년의 순례 여행) 또 한 사람의 위대한 북유럽의 화가는 로지에르 반 데르 웨이든(Rogier van der Weyden : 1400?~64)이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제단화> 여기에 나오는 인물들은 중세의 대작들을 연구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매채 안에 그대로 모방하려는 영감을 받은 연출가가 연출한 신비극이나 활인화에 실제로 나오는 배우들처럼 보인다. 고딕 미술의 주요 개념들을 새로운 사실적인 양식으로 번안함으로써 로지에르는 북유럽의 미술에 큰 공헌을 했다.

282p. 목판화술. 구텐베르크(Gutenberg)가 목판화 대신에 틀 속에 활자를 모아 인쇄하는 방법을 발명해내자 그러한 목판 인쇄본은 쓸모가 없게 되었다. 동판화의 경우에는 뷰린(Burin)이라는 특수한 동판용 조각칼을 가지고 동판을 눌러 긁는다. 동판화는 목판화와 정반대 방법으로 만드는 것이다. 라인강 상류의 콜마르(Colmar)에 살았던 마르틴 숀가우어(Martin Schongauer)의 동판화 <거룩한 밤>

 

15. 조화의 달성 (세기 초 : 토스카나와 로마)

그들은 자연의 신비를 탐색하지 않고서는, 또 우주에 감추어진 법칙을 밝히지 않고서는 명성과 영광을 얻을 수 없는 독립적인 거장들이었다. 이러한 야심을 가지고 있는 앞서가는 예술가들이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에 불만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의 사회적인 지위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수준이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속물들인 귀족들은 머리를 가지고 일하는 시인은 우대하면서도 손으로 일하는 미술가는 결코 대접하지 않았다. 이것은 또한 미술가들을 분발시킨 또 하나의 도전이자 자극이었다. 그들은 번창하는 공방의 존경받는 우두머리로서만이 아니라 독특하고 귀중한 재능을 가진 인간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위대한 업적을 성취하는 방향으로 그들 자신을 독려했다. <<>> 그러나 미술가들이 이러한 편견을 타파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은 역시 이들 후원자들이 갖고 있는 명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훌륭한 건물을 짓는다거나 화려한 무덤을 조성하도록 주문한다거나, 대규모 프레스코의 제작을 의뢰하거나 유명한 교회의 높은 제단에 그림을 봉헌하는 일 등은 그 사람의 이름을 영원히 남게 하고 이승에서의 그의 지위에 어울리는 기념물을 확보하는 확실한 방법으로 간주되었다. 가장 유명한 거장들을 유치하기 위해서 많은 도시들이 경쟁했으므로 거장들은 그들 나름대로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다. 미술가들은 마음대로 주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또한 그들의 작품을 고용주의 변덕과 기분에 맞추어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여간에 처음에는 이것이 엄청난 양의 억눌려 있던 에너지를 방출하는 해방의 효과가 되었다.

289p. 우리는 이런 식으로 생각했을 때 전통에 따라 성 베드로가 묻힌 자리에 세워졌던 고색 창연한 성 베드로 바실리카를 헐어내고 1506년에 그 자리에 교회 건축의 오랜 전통과 신에게의 봉사라는 목적에 얽메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교회를 짓기로 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교황이 이 일을 맡긴 사람은 이러한 새로운 양식의 열렬한 옹호자인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 : 1444 ~ 1514)였다. 

291p. 유명한 거장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 1452 ~ 1519)는 토스카나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에서 화가이며 조각가인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Andrea del verrocchio 1435 ~ 88)가 경영하는 유수한 공방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그는 그의 선배들이 했던 것처럼 미술가의 임무는 더 철저하게, 그리고 더 열정적으로, 더 정확하게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자연에 대한 이 모든 탐구는 그의 미술에 필요한 가시적인 세계에 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수단이었다.... 여하간에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그가 맡은 주문을 완성하지 못한 적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가 주문자의 성화 같은 재촉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미완의 상태로 내버려두곤 했다. 더군다나 그는 작품 완성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주장하고 그가 작품에 만족하지 않으면 작품을 내놓기를 거절했다.... <최후의 만찬> 밀라노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으로 사용하던 긴 홀의 벽화. <모나리자> 프렌체의 한 부인의 초상.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두어야 한다. 가령 윤곽을 그처럼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형태를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것같이 약간 희미하게 남겨두면 이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인상을 피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창안으로, 이탈리아어로 '스푸마토(sfumato)'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무잇인가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는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가리킨다.

303p. 16세기(천퀘첸토) 이탈리아 미술을 그렇게 빛나게 한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 1475~1564) 였다. 그는 13살의 소년으로 콰트로첸토 말엽 피렌체의 지도적인 화가의 한 사람이었던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Domenico Ghirlandaio : 1449 ~ 94)의 분주한 공방에 들어가 3년 간 도제 생활을 했다.... 30살이 될 무렵 그는 천재 레오나르도와 필적할 수 있는 당대의 가장 뛰어난 거장들 중의 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다. 피렌체 시는 영광스럽게도 그와 레오나르도에게 시의회의 대회의실 벽면에 피렌체 시의 역사와 관련된 일화를 그려줄 것을 의뢰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작품은 완성되지 못했다. 1506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로 되돌아갔으며 미켈란젤로는 그의 열정에 다시금 불을 지른 또 하나의 부룸을 받게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그를 로마로 초청하여 기독고 세계의 대왕에 상응하는 자신의 영묘를 세우게 했던 것이다... 즉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려는 계획과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왜냐면 그의 영묘는 원래 옜날 성당 건물 안에 안치될 계획이었는데 그것을 헐고 나면 그 영묘를 어디에 세울 것인가라는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미켈란잘로가 로마로 돌아오자 교황은 그에게 또 다른 주문을 맡겼다. 바티칸에 는 교황 식스투스 4세가 지은 시스티나 채플(Sistina Chapel)이라 불리는 작은 예배당이 있었다. 이 예배당의 벽면은 화가들, 예를 들어 보티첼리, 기를란다요와 같은 전 세대의 가장 유명한 거장들의 작품들로 장식되어 있었다. 그러나 궁륭형 천장은 아직 아무 그림이 없었다.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그 천장에 그림을 그려넣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예배당 안에 혼자 틀어박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계획을 혼자서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천지창조 - 아담의 창조> <죽어가는 노예>

313p.한 젊은 화가가 움브리아 지방의 우르비노(Urbino)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그는 라파엘(Raphael)로 알려져 있는 라파엘로 산티(Raffaello Santi : 1483 ~ 1520)였다. 그는 소위 '움브리아 파'의 지도자 피에트로 페루지노(Pietro Perugino : 1446 ~ 1523)의 공방에서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성 베르나르두스에게 나타난 성모> 제단화. 이 두 천재들이 보통 사람들과는 어울리기가 어려웠고, 그들에게 또한 예측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존재였지만 라파엘로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영향력 있는 후원자들의 마음에 들 수 있었다. <대공의 성모> 너무 유명.... 부유한 은행가인 아고스티노 키지의 별장 (빌라 파르네지나)에 그린 <요정 갈라테아> 그는 나름대로 상상한 조화로운 아름다움의 전형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그가 어쨋든 생명력과 성실성을 잃지 않고도 이상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황 레오10세와 두 추기경> 이 사람들이 그렇게 편안한 상태는 아니었으리라는 것을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당시의 세태는 어지러웠다. 왜냐하면 이 초상화가 그려진 때는 루터가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기금 모금 방법에 대해 교황을 공격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브라만테가 1514년 사망한 뒤 교황 레오 10세는 이 건축 사업의 책임을 라파엘로에게 맡겼다.

 

16. 빛과 색채 (16세기 초 : 베네치아와 북부 이탈리아)

331p. 타치아노(Tiziano : 1485? ~ 1576) <성모와 상인들과 페사로 일가> 성모 마리아를 그림의 중심에서 이동시켰으며 두 성인을 이 장면에 능동적으로 함여하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였는데 이것은 거의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타치아노가 당대에 그처럼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초상화 때문이었다. 그의 초상화의 매력을 이해하자면 일명 <젊은 영국인>이라고 불리우는 초상화의 머리 부분을 살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337p.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방법의 발전을 위해서 정진한 것은,,, 일명 코레조Correggio)라 불리운 안토니오 알레그리(Antonio Allegri : 1489?1534)였다. 코레조가 그의 대표착들을 그렸을 때 이미 레오나르도와 라파엘로는 사망했고 타치아노는 높은 명성을 얻고 있었다. <성모의 승천, 파르마 대성당> 빛의 효과를 자유자재로 조정하는 그의 능숙한 기술로 인해 그는 햇빛을 가득 받은 구름으로 천장을 채우고 그 구름들 사이로 천사들의 무리가 다리를 아래로 늘어뜨린 채 빙빙 떠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17. 새로운 지식의 확산 (16세기 초 : 독일과 네덜란드)

그들이 이탈리아 거장들의 위업이라고 지칭할 수 있었던 것이 세 가지 있었다. 그것은 과학적인 원근법의 발견과 아름다운 인체를 완벽하게 표현하도록 하였던 해부학에 관한 지식, 그리고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품위 있는 아름다운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고전 시대의 건축 형식에 관한 지식이었다.

342p. 그러나 진정한 미술가라면 미술의 새로운 원칙을 철저하게 이해하고 그 원칙의 유용성에 대해서 자기 나름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독일의 위대한 미술가인 알브레히트 뒤러 (Albrecht Durer : 1471 ~ 1528)의 작품을 통해서 이러한 극적인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용과 싸우는 미카엘> 이 위대한 한순간을 표현하기 위하여 뒤러는 종래의 전통적인 포즈를 모두 버렸다. 살려둘 수 없는 적과 싸우는 영웅을 종래와 같이 우아하고 유유자적한 모습으로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뒤러의 성 미카엘은 일정한 포즈를 취하며 공격을 감행하지 않는다. 그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350p. 위대함과 예술적인 기량에 있어서 뒤러와 비견할 수 있는 유일한 독일의 화가가 우리에게는 그 이름까지도 확실히 전해지지 않을 만큼 잊혀져 왔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한 수수께끼 같다. 17세기의 한 저술가는 아사펜부르크(Aschaffenburg)의 마티아스 그뤼네발트(Marthias Gruunewald)라는 화가에 관해서 상당히 혼란스럽게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 화가를 '독일의 코레조'라고 부르며..

 

18p. 미술의 위기 (16세기 후반 : 유럽)

1520년경 이탈리아 도시들의 모든 미술 애호가들은 회화가 완성의 극에 달했다는 사실에 의견의 일치를 본 것 같다.... 그는 당대의 위대한 거장들의 경이적인 작품들에 제아무리 감탄했다 할지라도 미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이미 다 이룩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인지에 대해 당연히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자세의 나체상을 즐겨 그렸다. 그들은 미켈란젤로의 나체상들을 그대로 배껴서 그것이 그들의 그림에 어울리든 안 어울리든 상관없이 그림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한 결과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울 때가 ㅁ낳았다. 예를 들면 성경 이야기를 그린 장면에 젊은 운동선수들 같은 우람한 체격의 나체 인물들이 가득 등장했다. 그 당시의 젊은 미술가들이 미켈란젤로의 작품 유행에 휩싸여 단순히 그이 수법(manner)만을 모방했기 때문에 잘못되었다고 보는 후대의 비평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매너리즘(Mannerism) 시대라고 불렀다.... 일단 거기에 익숙해지면 그러한 작품은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 놀랍고 기발하고, 전에는 들어보지도 못한 그런 것을 추구하려 한다. 물론 고전적인 거장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능가하려는 이 젊은 미술가들의 강박 관념에는 어딘지 건전치 못한 데가 있었다. 이것은 심지어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사람들까지도 괴상하고 기교에 치우친 쓸데없이 복잡한 실험을 하게 만들었다.

363p. 건축가이자 화가인 페데리코 추카리(Federico Zuccari : 1543? ~ 1609)가 설계한 얼굴 모양의 창문은 이러한 기발한 창안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다.

354p. 이 시기의 대표적인 미술가는 피렌체의 조각가이자 금세공사인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 : 1500 ~ 71)였다... 첼리니의 태도는 그전 세대가 했던 것보다 더 흥미있고 비범한 것을 만들려는 당대의 불안정하고 열광적인 노력들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정신을 코레조의 제자였단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 : 1503 ~ 40)의 작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긴 목의 마돈나>

368p. 16세기 후반의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베네치아 출신의 야코보 로부스터(Jacopo Robusti : 1518 ~ 94, 통칭 틴토레토(Tintoretto))였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것이 옳았던 틀렸던 간에 그는 이 성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자 결심했음이 분명하다. <성 마르코의 유해 발견>

371p. 16세기의 화가들 중에서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간 사람은 그리스의 크레타 섬 출신의 화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Domenicos Theorocopoulos : 1541? ~ 1614)로 보통 그는 간략하게 '그리스인'이라는 의미의 엘 그레코(El Greco)로 불렸다. <요한 묵시록의 다섯번째 봉인의 개봉>

374p.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계속해서 존속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심각한 문제와 부딪치고 있었다. 이 커다란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서 초래되었다. 많은 신교 교도들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숭배로 간주했다. 그래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 즉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칼빈 교도 중 강경파들은 심지어 집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도 일종의 사치라고 반대했다. 이런 것이 교리상 허용된 지역에서도 일반적으로 기후와 건물의 양식이 이탈리아 귀족들이 그들의 궁전에 그리게 했던 그런 대규모의 프레스코 화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된 것은 책의 삽화나 초상화 정도였다... 우리는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다. 홀바인(Hans Holbein the Younger : 1487 ~ 1543)은 뒤러보다는 스물여섯 살 아레이고 첼리니보다는 불과 세 살 위였다. 영국 왕실 소속 초상화.. <리처드 사우스웰 경> 그의 초기의 초상화에서는 인물의 배경, 즉 평소에 그 인물이 가까이 했던 것들을 통해서 주인공의 특성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며 세부를 묘사하는 그의 탁월한 솜씨를 여전히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점차 나이가 들고 기법이 완숙해감에 따라서 그러한 트릭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을 내세우려 하지도 않았으며 또 초상 인물로부터 시선을 다른데로 돌리게 의도하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의 그림을 높이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장다운 절제 때문이다.

 

19. 발전하는 시각 세계 (17세기 전반기 :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그 이전의 양식들은 각각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식별하기가 용이하였으나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오늘날 이러한 양식들을 가리키는 어휘들 대부분이 그것이 처음 쓰여진 당시에는 낮추어 평가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되던 단어였다는 사실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바로크'라는 말도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해서 반감을 가졌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그것을 조롱하기 위해서 사용한 말이었다. 바로크라는 말은 사실은 터무니없다든가 기괴하다는 의미로,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채택한 방법 이외의 다른 식으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였다.

390p.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로 와서 아주 정반대의 수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사람의 화가들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한 사람은 볼로냐 출신의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 1560 ~ 1609)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 출신의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 1573 ~ 1610)였다. 카라치는 매너리즘 화가들이 의도적으로 거부했던 라파엘로의단순성과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했다...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성모>, 카라바조에게는 추한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경멸할 만한 약점으로 보였다. 그가 원하는 것은 진실, 즉 그가 본 그대로의 진실이었다. <의심하는 토마>

396p. 회고적인 아름다운 분위기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해진 사람은 이탈리아로 귀환한 또 한 사람의프랑스 화가였다. 그는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 1600 ~ 82)으로 푸생보다 여섯 살 아래였다. 로랭은 캄파냐(로마 평원), 즉 아름다운 남부의 색조 속에 위대한 과거를 연상시키는 장엄한 유적들이 있는 로마 주변의 평원과 언덕들을 열심히 스케치했다. 그는 화면 전체의 장면을 현실과 다르게 보이게 만드는 금빛 광선이나 은빛 대기 속에 이 모든 것들을 무르녹아 들어가게 묘사했다. 자연의 숭고한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사람들의 눈을 뜨게 만든 화가는 바로 클로드 로랭이었고, 또 그가 죽은 뒤 거의 백년 쯤 되었을 때 여행객들은 그의 기준에 따라서 실재의 풍경을 평가하곤 했다. 

397p. 플랑드르 출신의 페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 : 1577 ~1640). 네덜란드 출신의 이들 화가들은 항상 다채로운 사물의 표면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화면 속에 인물들을 배치하고 전체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빛과 색채를 구사하는 기술을 공부했다. <성인들의 경배를 받고 있는 성모와 아기 예수>. 그는 채색을 한 작은 스케치만을 그릴 때가 많았다. 그러한 스케치에 담긴 구상을 큰 화폭에 옮기는 일은 그의 제자들이나 조수들이 할 일이었고, 그들의 스승의 구상대로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마치면 그제서야 루벤스가 붓을 들고 얼굴이나 비단 옷에 손질을 하거나 거칠게 대조가 되는 부분들을 부드럽게 완하시키곤 했다. 그는 자신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당장 생기를 띠게 딘다고 학신했는데 사실상 그의 생각은 옳았다. <자화상> <평화와 축복에 대한 알레고리>

405p. 루벤스의 유명한 많은 제자와 조수들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사람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 : 1599 ~ 1641)다. 1632년 찰스 1세의 궁정화가. 반 다이크가 초상화에 많은 해독을 끼친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인형에 의상을 입혀 그림) <세비야의 물장수>

406p. 마드리드의 펠리페 4세의 궁전 - 디에고 벨라스케스 (Diego Velazquez : 1599 ~ 1660). 그는 '자연주의'의 방침을 흡수하여 전통에 구애받지 않고 자연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데 그의 예술을 바쳤다. <라스 매니나스(시녀들) Las Meninas> 마르가리타 공주. 현실을 한순간을 화면에 담았다고 상상하고 싶다. 아마도 왕과 왕비가 앉아 있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공주를 불러들였는데 왕이나 앙비가 벨라스케스에게 그가 그릴만한 모델이 왔다고 말을 했을 것이다.

 

20. 자연의 거울 (17세기 : 네덜란드)

벨기에라고 부르는 네덜란드의 남부지역은 그 당시 가톨릭으로 남아있었다... 네덜란드의 북쪽 지방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의 태도는 영국의 청교도들과 흡사했다. 즉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며 대부분 남쪽 지역의 호사스러운 허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가톨릭 국가들을 휩쓴 바로크 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교 사회에서 계속 될 수 있었던 이런 회화의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것은, 홀바인의 경우가 잘 증명해주듯이 바로 초상화 그리기였다. 성공한 많은 상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후손들에게 남기고 싶어했으며, 시장이나 시의원으로 선출된 명사들은 그들의 직위를 나타내는 표지가 들어 있는 초상화를 원했다.

414p. 자유로운 신생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출현한 거장인 프란스 힐스(Frans Hals : 1580? ~ 1666). <피터 반 덴 브루케 초상> 할스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주문한 사람을 어떤 특정한 순간에 '포착해서' 그의 화폭에 영원히 고정시켰다는 인상을 준다. 할스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 즉 초상화의 주인공이 그들다운 동작과 분위기 속에서 우연하게 취하는 듯한 순간적인 인상의 포착은 치밀하게 계산된 노력이 없이는 결코 이룩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얼핏 보기에 될 대로 되라는 식인 듯한 접근 방법도 사실은 세심하게 짜낸 효과의 결과이다. 바로크 시대의 다른 거장들과 마찬가지로 할스도 규칙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이룩해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416p. 별로 이름이 나지 않은 군소 화가가 명성을 이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회화의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지몬 데 블리헤르(Simon de Vlieger : 1601 ~ 53) <해풍에 흔들리는 네덜란드 군함과 수많은 범선들> 바다의 분위기를 얼마나 놀랄 만큼 단순하고 솔직한 방식으로 표현하였는지를 보여준다.

418p. 얀 반 호이엔(Jan van Goyen : 1596 ~ 1656). <강변의 풍차> 이처럼 평범한 풍경을 평온한 아름다움이 베어 있는 정경으로 변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우리들의 눈에 익은 모티프들을 변화시켜서 우리들의 시선을 아득히 먼 곳으로 인도하며 마치 우리들이 제일 좋은 위치에 서서 저녁 햇살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픽처레스크, picturesque)

420p. 네덜란드가 낳은 최고의 화가이며, 그리고 아마도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 : 1606 ~ 69) <자화상> 렙브란트는 그의 추한 모습을 결코 감추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성실하게 관찰했다. 우리가 이 작품의 아름다움이나 용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성실성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영혼의 활동'이라고 부른 것에 관해서 램브란트가 가지고 있던 거의 신비스러울 정도의 지식을 표현할 길이 없다. <다윗 왕과 압살롬의 화해> 뷔랭이 아닌 애칭Etching 동판화 <설교하는 그리스도>

428p. 풍경화가 야콥 반 로이스달(Jacob van Ruisdael : 1628? ~ 82)

 

21.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Ⅰ (17세기 후반과 18세기 : 이탈리아)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 1599~1667) <전성기 바로크 양식의 로마 교회 : 산티 아그네스 성당>

437p. 무대장식과도 같은 현란한 미술은 주로 잔 로렌초 베르나니(Gian Lorenzo Bernini : 1598 ~ 1680)에 의해서 발전되었다. <성 테레사의 환희>

18세기 이탈리아 미술가들은 대부분 뛰어난 실내 장식가들이었으며 치장 회반죽 세공과 대형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는 기술에 있어서 유럽 전역에 이름을 날렸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 1696 ~ 1770) <클레오파트라의 연회>

 

22. 권력과 영광의 예술 Ⅱ (17세기 말과 18세기 초 :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17세기 유럽의 왕과 영주들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권력을 과시해서 민중의 마음을 지배하려고 고심했다. 루이 14세의 경우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베르샤유가 바로크 양식인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거대한 규모 때문이다.

454p. 앙투안 바토(Antoine Watteau) <공원의 연회> 그는 현실의 모든 어려움과 자질구레한 일에서 동떨어진 자기 자신의 환상적인 생활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상상의 공원에서 즐거운 야유회를 즐기는 꿈 같은 생활로 거기에는 비도 오지 않으며 숙녀들은 모두 다 아름답고 그녀들의 연인들은 우아하며, 모든 사람들이 허세를 부리지 않고 번쩍이는 비단 옷을 입고 사는 사회, 남녀 목동들의 삶이 마치 미뉴에트 춤의 연속처럼 보이는 그런 세상이다. (로코코 Rococo.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표현되는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

 

23. 이성의 시대 (18세기 : 영국과 프랑스)

크리스토퍼 렌 경(Sir Christopher Wren : 1632~1723) 세인트 폴 대성당.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 1697~1764) 그는 의도적으로 국민들의 관심을 글 새로운 양식의 그림을 창조해내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착한 일의 보상과 악한 일의 대가를 가르칠 많은 교훈적인 내용을 그릴 것을 계획했다. <베들레햄의 탕아>

죠수아 레이놀즈(Sir Joshua Reynolds : 1723~92)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울즈 양>

 

24. 전통의 단절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 영국, 미국 및 프랑스)

480p. 그림이란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철학과 같은 하나의 과목이 되어버렸다. '아카데미(academy)'라는 말 자체가 이러한 새로운 접근 방식 자체를 암시하고 있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그의 제자를 가르쳤던 올리브 숲 이름에서 나온 말로서, 나중에는 지혜를 추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을 가리키게 되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기들이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학자들과 맞먹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 불렀다. 아카데미에서는 엤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는 데 역점을 두었는데 바로 이 사실이 후원자들로 하여금 당시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보다 거장의 작품을 사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아카데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그 후 런던에서도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계획하였다. 오늘날 화가와 조각가들이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고 구매자를 찾기 위해 전시회를 열고 또한 그것을 위해 작품을 주로 제작한다는 관념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는 우리로서는 이것이 얼마나 획기적인 변화였는지 깨닫기 힘들 것이다. 요구하는 것이 무언지 분명한 개인 후원자들이나 취향을 짐작할 수 있는 일반 대중을 위해 작품을 만드는 대신 미술가들은 이제 전시회에서 성공하기 위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었다.

482p. 이러한 신고젅의 양식의 지도자는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 ~ 1825). <암살당한 마라>

485p.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 : 1746~1828) <발코니의 사람들>, <거인>

 

25. 끝없는 변혁 (19세기)

'전통의 단절'은 프랑스 대혁명 시기를 특징지으면서, 당시 미술가들의 생활과 작품 활동의 여건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일단 기타 세부 사항이 협의된 후에는 건축가에게 문은 고딕 양식으로, 건물은 노르만 성이나 르네상스의 궁전 혹은 오리엔트 회교 사원 양식으로 해달라는 요구를 했다. 성당은 대게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는데, 이는 고딕 양식이 소위 '신앙의 시대'에 지배적인 양식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극장이나 오페라 하우스에는 과장된 바로크 양식이 선호되었으며 성이나 관공서에는 위엄 있어 보이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이 적용되었다.

500p.  1834년 옛 의사당이 불타 없어지자 새로운 설계가 공모되었는데, 르네상스 양식 전문가인 찰스 베리 경 (Sir Charles Barry : 1795 ~1860)의 설계가 채택되었다. 영국의 시민적 자유는 중세 시대에 쟁취되었으므로 자유의 상징인 의사당도 중세 고딕 양식을 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하였다. 그리하여 배리 경은 고딕 양식의 부활을 줄기차게 옹호하던 건축가들 중 한 사람으로 고딕 식 세부 장식의 전문가인 퓨진 (A. W. N. Pugin : 1812 ~ 52)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505p. 새로운 미술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들은 파리에서 일어났다. 왜냐하면 유럽 미술의 중심지가 15세기의 피렌체, 17세기의 로마를 거쳐 19세기에는 파리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 또 무엇보다도 몽마르트르의 카페에서 이루어지는 끝없이 계속되는 미술의 본질에 대한 토론에 함께 하기 위해 파리로 몰려들었다. 19세기 전반기의 보수파 화가들의 지도자는 장-오귀스트-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 : 1780 ~ 1867)였다. 엥그르는 학생들에게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즉흥성과 무질서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앵그르의 반대자들이 모이는 구심점은 외젠 들라크루아 (Eugene Delacroix : 1798 ~ 1863) 였다. 그는 회화에 있어서는 소묘보다는 색채가, 지식보다는 상상력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었다.

507p. 1848년 2월 혁명 시기에 일군의 화가들이 프랑스의 바르비종(Barbizon)이라는 마을에 모여 컨스터블의 지도 아래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했다. 이들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cois Millet : 1814 ~75)이다. <이삭 줍는 사람들>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사실주의 Le Realisme)

511p. 프랑스 미술의 세번째 혁명의 물결 (들라크루아에 의한 첫번째 혁명의 물결과 쿠르베에 의한 두번째 파동을 거쳐)은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 1832 ~ 83)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진부하고 무의미해진 회화의 인습을 찾아내려 하였다. 즉 전통 미술에서 사용하는 표현 방법은 기껏해야 인공적인 조건하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눈을 믿는다면, 그리고 사물을 반드시 이렇게 보아야 한다는 아카데미의 규칙을 탈피한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발견했던 것은 우리가 옥외에서 자연을 볼 때 각 대상들이 그들 고유한 색깔을 가진 개별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눈에서(실제로는 우리 마음 속에서) 뒤섞여 훨씬 더 밝은 색조의 혼합물로 보인다는 사실이었다.  1863년 '낙선전(Salon des Refuses)'

517p. 마네와 손을 잡고 이러한 생각들을 발전시키는 데 협력한 화가들 중 르아브르(Le Havre) 출신의 가난하지만 고집 센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다름아닌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 1840 ~ 1926)였다.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회화는 반드시 '바로 그 현장'에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모네의 생각은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안이한 제작 방법을 거부한 것이기에 필연적으로 기법상 새로운 방법들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근 ㄴ화면 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 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완전한 마무리, 즉 되는 대로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제작 방식이었다. <1874년 인상:해돋이> 비평가들 중 한 사람은 이 그림의 제목이 우습다고 생각하여 그 전시회에 참가한 그룹 전체를 '인상주의자들(Impressionists)'이라고 조롱 섞인 어투로 부르기 시작했다.

520p. 새로운 원리들을 실제 생활의 장면에 적용한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Pierre Auguste Renoir : 1841 ~ 1919) <물랑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522p. 가장 인상주의적인 방법을 고수했던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 1830 ~ 1903) <이탈리아 거리, 아침, 햇빛>

524p. 인상주의에 영향을 준 두가지. 사진술과 일본의 채색 목판화

528p. 오귀스트 로뎅(Auguste Rodin : 1840 ~ 1917) 다른 인상주의자들처럼 그도 '마무리'된 외관을 혐오했다. 그들처럼 로뎅도, 자신의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기를 좋아했다.

 

26. 새로운 규범을 찾아서 (19세기 후반)

그들은 각각의 재료가 갖고 있는 가능성과 디자인을 나타낼 수 있는 새로운 감각의 '신미술(Art Nouveau, 심미주의적이고 장식적인 경향의 미술운동)'을 갈망했다. 

536p. 폴 세잔(Paul Cezanne : 1839~1906). 그는 '자연으로부터 푸생'을 그리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고 스스로 말했다 한다. <벨뷔에서 본 생트, 빅투아르 산> <정물> - 밝은 색채를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깊이감을 살리고, 깊이감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질서 있는 화면 배치를 이루려고 한 그의 피나는 노력, 그 모색과 고투 속에서 필요하면 기꺼이 희생시키고자 했던 단 하나는 바로 윤곽선의 고루한 '정확성'이었다.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 1859~91)의 점묘법Pointillism.

544p.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에서 목사의 아들로 테어나 영국과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할 만큼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는데, 밀레의 작품과 거기에 담긴 사회적 교훈에 큰 감명을 받아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곡물밭> 고흐의 붓자국들은 그의 격양된 심리 상태를 전달하기 위한 것들이다.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려 했고 이러한 목적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형태를 왜곡시켰다.

550p. 폴 고갱(Paul Gauguin : 1848 ~ 1903) 그는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미술이 겉멋에 빠져 피상적으로 되어가는 위험에 처해 있으며 유럽에서 축적되어온 천박한 모든 재능과 지식이 인간의 가장 귀중한 능력, 즉 강렬하고 예리한 감성과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법을 빼앗아버렸다는 확신을 굳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백일몽>

555p. 이 세 사람의 화가가 모색했던 제각각의 해답은 세 가지 현대 미술 운동의 이념적 바탕이 되었다. 세잔의 해결 방법은 결국 프랑스에 기원을 둔 입체주의(cubism)를 일으켰고, 반 고흐의 방법은 독일 중심의 표현주의(Expressionism)를 일으켰다. 고갱의 해결 방법은 다양한 형태의 프리미티즘(primitivism)을 이끌어냈다. 처음에는 이 세 가지 운동이 '미친'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자신들이 처해 있던 막다른 상태에서 탈출하기 위한 미술가들의 끊임없는 시도로서 어렵지 않게 설명될 수 있다.

 

27. 실험적 미술 (20세기 전반기)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 1883~1969)가 데사우(Dessau)에 설립한 바우하우스(Bauhaus). 이 학교는 미술과 기계 기술이 19세기처럼 분리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상호 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워졌다. 학생들은 건축물과 가구의 설계를 실습했다. '기능주의(functionalism)' 목적에 맞게 설계되어야만 그에 따라서 형태도 아름답게 보인다는 신념.

노르웨이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 1863~1944) <비명>

러시아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 1866~1944). <미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것에 관하여, 1912> 순수색의 심리학적 효과, 이를테면 밝은 빨강색이 트럼펫 소리와 같은 느낌을 부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방법으로 정신과 정신을 결합시키는 것이 가능하며 또 그것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그는 색채로 표현된 음악을 최초로 시도하여 전시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로서 '추상미술 abstract art'이라고 불리는 것이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스페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 1881~1973) 그는 아주 단순한 요소들로부터 얼굴이나 사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 입체주의는 어느 정도 익숙한 형태에 한해서만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예술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왜 새의 노래는 이해하려 들지 않는가?"

미국 라이오넬 파이닝어(Lyonel Feininger : 1871~1956). 서로 중첩되는 삼각형들로 그림 구상 <범주>

루마니아 출신의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 1876~1957). 극도의 단순화. <압맞춤>

네덜란드 화가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 1872 ~ 1944). 가장 단순한 요소인 직선과 원색으로 그림을 만들어...

영국 미술가 벤 니콜슨(Ben Nicholson : 1894~1982). 원이나 사각형과 같은 단순한 형태들 간의 관계

알렉산더 콜더(Alexander Calder : 1898 ~ 1976) <어떤 우주>

584p. 현대 미술가들은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을 창조했다고 느끼고자 한다. 제아무리 솜씨 있게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단지 현실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사품이나 단순한 장식품에 그치는 것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그럴 듯하고 영속적인 어떤 것, 이 무미건조한 세상에 존재하는 볼품없는 물건보다 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어떤 것을 창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590p. 이탈리아계 스위스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 1901~66) <두상>

592p. 초현실주의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미국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던 스페인 출신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 1904~89)가 있다. 그는 꿈의 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이상야릇한 혼돈 상태를 모방하려 했다.

597p.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태와 색채가 '재대로' 될 때까지 그것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 방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뚜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 데 따른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뛰어난 남녀들이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않게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28. 끝이 없는 이야기 (모더니즘의 승리)

쿠르트 슈비터스(Kurt Schwitters : 1887 ~ 1984) 전통적인 안료와 캔버스의 사용을 거부하는 거의 태도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에 취리히에서 시작된 극단적인 예술 운동과 관련이 있었다. 다다(Dada) 그룹.

602p. 내적인 동기나 목적과 상관없이 순수하게 물감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는 붓놀림에 의해 생겨나는 흔적에 관심을 가진 이러한 경향을 타쉬즘(tachisme)이라 했는데, 이는 타슈(tache), 즉 얼룩이라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말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물감을 바르는 새로운 방법으로 흥미를 유발시켰던 사람은 바로 미국인 작가 잭슨 폴록 : 1912~56)이었다. 그는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물감을 뚝뚝 떨어트린다거나 또는 화면에 붓거나 뿌려대는 등의 방법으로 놀라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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